대통령한테 호루라기 안 불었던 여당
윤석열 대통령이 지난 3일 계엄을 선포했을 때 한동훈 국민의힘 대표는 20분 만에 ‘당대표 입장문’을 냈다. “계엄 선포는 잘못됐고 국민과 함께 막겠다”는 내용이었다. 또 ‘위법이자 위헌’이라고 규정했다. 계엄 선포 뒤 나온 첫 반대 입장이었다. 집권당 대표의 발 빠른 위헌 선언은 계엄의 부당성이 확산되는 데 불을 붙였다. 그 소식이 계엄 출동하던 군인과 경찰이 소극적으로 나서게 하고, 의원들이 국회로 진입하는 데에도 도움을 줬을 것이다.그런데 그날 여당 대표가 외부 수혈된 한 대표가 아닌 다른 사람이었으면 상황이 어땠을까. 가령 친윤석열계 인사였으면 어떻게 행동했을까. 촌각을 다투는 상황에서 그렇게 20분 만에 대통령을 강력하게 규탄하는 입장을 냈을까. 유감스럽게도 계엄 사태 이후의 여당 풍경을 보면 그럴 개연성은 극히 희박했을 것 같다.계엄 선포 사흘 뒤 여당 소속 시·도지사 11명은 탄핵만은 피해야 한다는 호소문을 냈다. 또 윤 대통령에게 거국내각 구성 뒤 2선으로 물러나고, 임기단축 개헌을 비롯한 향후 정치 일정을 밝히라고 주문했다. 개헌 약속으로 2026년 6월 지방선거 때까지 대통령직을 유지할 수 있게 해주자는 취지였다.
여당에선 지난 10일 중진 20명이 모여 회의를 했다. 이들은 계엄 해제 표결 불참 논란으로 물러난 추경호 전 원내대표 후임으로 권성동 의원을 추대하자는 입장을 발표했다. 그들 바람대로 권 의원은 12일 원내대표로 선출됐다. 권 의원은 그냥 ‘친윤’도 아니고 ‘찐윤’이다. 윤 대통령을 가장 앞장서서 옹호해 왔다. 대통령이 국민의 지탄을 받는 상황에서 ‘원조 윤핵관’을 원내대표로 세우는 당이 국민의힘이다.홍준표 대구시장은 지난주 탄핵소추안 부결 뒤 이렇게 주장했다. “탄핵안이 부결돼 참 다행이다. 대통령은 내각·대통령실을 전면 쇄신해 달라. 책임총리에게 내정을 맡기고 외교·국방에만 전념해 달라.” 이 역시 대통령이 계속 나라를 대표하며 자리를 지켜야 한다는 주문이다. 홍 시장은 이후 ‘계엄 선포권은 대통령 권한이고 고도의 통치 행위로 사법심사 대상이 안 된다’는 글도 썼다. 같은 당 윤상현, 조배숙 의원도 계엄을 내란으로 규정하는 것은 신중해야 한다고 같은 주장을 했다. 사전에 말을 맞췄는지 모르겠으나 이들의 주장은 12일 계엄 선포를 정당화하는 대통령 담화에 그대로 담겼다.
여당의 이런 모습은 계엄에 충격 받은 국민들 생각과 큰 차이가 난다. 상처받은 국민을 보듬기보다 대통령을 보호해야 한다는 마음이 앞서 있다. 대한민국 민주주의 역사에 씻을 수 없는 오점을 남기고, 국격을 실추시킨 일을 여당에서 정치 좀 했다는 이들이 이런 식으로 어물쩍 넘어가려 하고 있다. 그런 게 통하리라 생각한 것부터 신기하다. 민심을 진짜 모르거나 아니면 국민을 우습게 보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민심을 못 따라가는 여당의 초현실주의 정치와 ‘윤비어천가’ 풍조가 계엄 사태가 초래되는 데 일조했을 수 있다. 여당은 윤 대통령을 막아서야 할 때 번번이 침묵했고, 오히려 두둔하기 바빴다. 지난해 전당대회 때 당대표 후보로 출마하려던 안철수, 나경원 의원을 대통령실이 ‘무례의 극치’ ‘국정운영 방해꾼이자 적’ 등의 비난으로 주저앉혔을 때가 대표적이다. 출마를 막기 위한 ‘전대 계엄령’이 내려졌던 셈인데 당 구성원들은 멀뚱멀뚱 쳐다만 봤다. 대통령이 야당 대표와 2년간 대화를 거부하고, 국회 개원식 참여를 거부했을 때도 여당에선 별 비판이 없었다. 강서구청장 보궐선거를 위한 사면(赦免) 무리수를 둘 때도, 강성 우파들만 골라 기관장에 앉힐 때도 마찬가지였다. 당대표가 용산에서 ‘훈계’ 받듯 당하고 왔을 때도, 지난달 대통령이 하나 마나 한 기자회견을 했을 때도 대다수는 가만히 있었다. 돌이켜보면 지난 2년 반 동안 대통령과 관련한 ‘비정상’이 만연돼 있었는데 아무도 호루라기를 불지 않았다. 한 대표가 오기 전까지 계속 그랬다.
대통령 탄핵 못지않게 이제 여당의 비겁한 침묵, 무비판적 동조, 무책임한 방조의 문화를 걷어내야 한다. 옳지 못한 것을 옳지 못하다 목소리 내지 않고, 고칠 것을 고치라고 요구하지 않고, 부당한 개입에 저항하지 않고, 동료가 탄압당할 때 얼굴을 돌리는 문화를 싹 뜯어고쳐야 한다. 이번에도 그렇게 하지 못한다면 그땐 국민이 여당을 탄핵할지 모른다.